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엔터테인먼트사업본부와 교육사업본부 직원들과 함께 1박 2일 동안 워크숍을 다녀왔다. 을왕리 숙소에 도착해서 3시간 정도 가볍게 2023년 사업을 평가하고 2024년 사업의 방향과 계획을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함께한 저녁 뒤풀이와 해변의 산책,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무의도 해상공원 나들이와 동양염전 카페에서의 즐거운 대화로 가을의 청명함 속에서 진행된 워크숍을 마무리했다.
매년 진행되는 우리 회사의 전사 워크숍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직원들이 워크숍을 매우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즐거운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웃고 떠드는 모습이 무척 자유로워 보였고 해방된 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 같아 참 보기에도 좋았다. 물론 나도 직원들의 에너지를 전달받아서 함께 행복했다.
우리 회사의 워크숍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 같은 창의적인 형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본부별로 워크숍 행사의 자율권을 주어 스스로 워크숍을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도록 위임한 것이 가장 큰 방향의 전환이었다. 두 번째로 회의나 프로그램을 확 줄여 업무에 관한 회의는 숙소에 도착해서 3시간 정도만 진행한 후, 다음 날까지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배정하여 직원들이 마음의 부담을 덜고 다 함께 참여하는 워크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개선해야 할 지점이 많지만 직원들이 설렘을 가지고 워크숍을 기다리고 또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탁월함에 이르는 길이란 무엇인가?
우리 회사 워크숍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탁월함에 이르는 길에는 올라섰다고 생각한다. ‘탁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이다. ‘높다, 눈부시다, 독특하다’라는 비슷한 뜻으로도 사용된다. 탁월함이라는 말에는 ‘창의성이 뛰어나다’는 본질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창의적인 개인이나 조직만이 탁월함에 이른다는 조금 성급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고 탁월함을 지향하는 것은 나와 우리 회사의 화두였다.
‘탁월함에 이르는 길’이란 말은 ‘자율성’과 ‘자발성’이 창조하는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자율성은 책임의 세계라면 자발성은 자유의 세계다. 탁월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율성’과 ‘자발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중심 생각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율성’과 ‘자발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면 혼란, 즉 카오스 상태에 갇혀 있게 된다. 하지만 혼란 또는 카오스란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는 기미나 징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개인이나 조직이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조직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개인이나 조직이 카오스 상태일 때 에너지는 급격히 소모된다.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고 미토콘드리아도 건강한 세포를 생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럴 때 우리의 감정은 “힘들다. 아, 인생이란 진짜 힘든 것이구나!” 하고 느낀다. 이렇게 오장육부를 비롯해 신체로 느끼는 것이 외부로 표출되어 사회적인 옷을 입은 것이 바로 ‘감정’이란 개념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이 바로 감정이다. 모든 인간은 이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힘들다’라는 상태는 희·노·애·락·애·오·욕이 자연스럽게 또는 아름답게 표현되지 못하거나 충동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을 힘들게 하는 세 가지 상태
나는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세 가지 상태를 이렇게 정의해 왔다. ‘나를 사랑하지(돌보지) 않는 것’, ‘성장을 거부하는 것’,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 이 상태에 놓이면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긍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아예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 상태를 철학자 스피노자는 ‘삶의 능동성을 상실한 상태’로 보았다.
스피노자에게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기쁨 목록을 넓혀가는 것인 동시에 슬픔 목록을 줄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은 더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며 슬픔은 더 불완전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에게 이로운 대상을 만나 신체의 활동이 증대되면 욕망이 ‘기쁨’으로, 해로운 대상을 만나 신체의 활동이 감소되면 욕망이 ‘슬픔’으로 바뀐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기쁨을 능동으로 슬픔을 수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대상과의 적정 거리(최적화된 거리)를 두는 기술을 통해 능동성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태도라 인식했다.
스피노자 이전에 에피쿠로스학파는 마음의 혼란이나 동요를 불행의 시작으로 보았다. 마음의 혼란이나 동요가 없는 평정과 평온의 상태가 행복(아타락시아)의 시작이라고 여긴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마음의 혼란과 동요로부터 도주(자유)가 행복을 만든다. 이로써 행복은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오늘 이야기가 너무 먼 곳으로 간 것 같다. 하지만 앞서 한 이야기는 “탁월함에 이르는 길은 ‘자율성’과 ‘자발성’이 창조하는 세계에 관한 표현이다”라는 문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부처는 모든 존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며, 이 존재의 실상을 깨달을 때 평정과 평온(삼매)에 머무른다고 했다. 평정과 평온을 유지하는 사람은 ‘수처작주 입처개진’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까지 ‘자율성’과 ‘자발성’에 관한 표현 중에 금강경의 ‘수처작주 입처개진’만 한 문장을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할 수 있는, 즉 ‘자율성’과 ‘자발성’을 스스로 마음을 내어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탁월함의 경지에 오른다.
삶의 즐거움은 몰입에 있다
인생의 탁월한 완성을 꿈꾸었던 공자는 평생 네 가지 걱정거리를 성찰의 거울로 삼았다. 바로 “덕을 닦지 않는 것, 학문을 전수하지 않는 것, 의로움을 듣고도 옮기지 않는 것, 선하지 않는 것을 고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짊을 구해 어짊을 얻었는데 어찌 원망하겠느냐?”, “의롭지 않는 부와 귀한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도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공자는 내면을 다스려(수양) 그 어떤 순간에도 양심에 어긋남이 없을 때 그것을 어짊(仁), 즉 행복이라 느꼈다.
그는 삶의 즐거움은 몰입에 있으며 노력하면서도 즐거워야 몰입의 상태에 이른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경지를 분별했다. “분발하여 밥 먹는 것도 잊는다(노력의 상태)”,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는다(즐거움의 상태)”,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몰입의 상태)” 공자에게 진정한 몰입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상태를 말한다.
공자는 자신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은 성인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성인이 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나는 성인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서 민첩하게 구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을 태어나서부터 아는 사람(성인), 배워서 아는 사람(군자), 곤경에 처해야 배우는 사람(소인),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는 사람(도적)으로 구분했는데, “도적은 고통의 원인을 다른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행동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며 오직 도적만이 배우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는 성인, 군자, 소인, 도적의 일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도적이 된다는 것은 욕망만을 키운다는 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존재 안에 있던 잠재적 역량이 피어나게 된다. 그래서 공자는 인생을 완성해 가는 배움의 세 가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묵묵히 아는 것, 배움을 싫증내지 않는 것,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를 일관되게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자가 배움의 최고 경지로 본 것은 “내가 어질어지고자 하면 어짊에 이를 수 있다”라는 매우 평범하고도 탁월한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