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안녕하세요. 저는 신임 4팀장입니다. 줄여서 '신사팀장'이라고 할게요. 팀장으로서 경험도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대표님께 당당히 배움을 청했습니다. 대표님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터득한 출판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아니 그 일부나마 제 것으로 만들어야 저희 팀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겠다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대표님과 식사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이 귀한 지식을 저 혼자만 알기엔 너무 아까웠기에, 다산북스 식구들은 물론 출판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독자들과 만나는지 궁금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콘텐츠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그 네 번째 테마는 바로 "출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좋은 디자인이라는 게 사실 직관적으로 판단되는 거라 말로 설명하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상업 출판에 있어 좋은 디자인의 의미에 대해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디자인과 ‘크리에이티브’라는 말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create)는 뜻인데, 성경 창세기에서 유래한 단어죠. 그런데 여기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이 일곱 번 반복됩니다. 그저 천지를 창조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만들고 보니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고객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뭐든 고객이 보기에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고객의 삶을 향상시키고 고객의 개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디자인은 결국 좋은 디자인 철학에서 나옵니다.

그럼 디자인 철학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시대정신을 구현하지요. 기능적인 디자인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시대성을 먼저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를 깊게 고민하는 디자이너는 업계 전체를 이끌고 가는 힘을 가집니다.
디자인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디자인’일 텐데, 수많은 책이 쏟아지는 시장에서 그걸 피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카테고리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자기만족에 빠진 독특한 디자인을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순 없으니까요. 시대성을 구현하는 보편성과 대중성 확보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중요한 건 역시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인지 판단하는 안목과 카테고리 1등 상품을 넘어서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의지와 철학입니다. 이런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작업하면 너무 비슷한 인상을 주는 책이 탄생합니다. 식상한 상품에 매력을 느낄 만한 고객은 많지 않지요.
그러면 트렌드를 벗어나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그런 천재적인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이런 디자이너들은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시대와도 불화를 빚기도 하지요.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설득과 소통에 있어서도 엄청난 에너지를 쓰게 되므로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쉽지 않은 길이므로 존경 받아야 마땅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하나의 표지를 새로워 보이게 만드는 걸까요?
표지 디자인은 결국 레이아웃과 이미지 싸움입니다. 색다른 레이아웃과 이미지를 찾아야 컨셉의 임팩트 있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앞표지뿐만 아니라 책등과 뒤표지까지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꽤 넓은 공간인데, 모든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책의 디자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도 중요한 요소 아닌가요?
네, 그런데 표지 디자인에 있어 텍스트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중요하다기보다는 구현하려고 하는 디자인에 그 텍스트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혹은 방해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메시지의 반복입니다. 제목부터 카피까지 계속 동어 반복만 하고 있다면 그 책은 전혀 새로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디자이너는 방해가 되는 텍스트, 동어 반복이 되는 텍스트는 과감하게 걸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편집자의 영역이라고 선을 그어 소극적으로 작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디자인도 결국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봐야하는 거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타깃 독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필수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위선이나 과장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특징이나 개성을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과장하려고 힘을 쓰는 순간 강약조절에 실패해 전체적인 조화가 깨집니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미적으로 좋아 보이는 디자인 역시 그 핵심은 다양하게 해석되는 조화로움에 있습니다. 조화를 잘 이뤄 아름다움을 획득한 디자인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여백의 미를 잘 살린 표지 <문장의 온도>와 <서툰 감정>
여백의 미를 잘 살린 표지 <문장의 온도>와 <서툰 감정>
대표님께서 평소 비움의 미학을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는 거겠죠?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일단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버리는 것 속에 여백이 생기는데, 여백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제야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백의 미가 표지를 감각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요. 시장 전체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수준이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그 다음의 길은 금방 열립니다. 외부의 새로운 현상이나 느낌이 내 안으로 들어와 울림을 주는 걸 저는 ‘인사이트’라고 부릅니다. 비우지 않고 이것저것 채우기만 한다면 이런 순간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편집자와 디자이너 모두 상대와 소통하는 걸 많이 어려워하는데 좋은 팁 같은 게 있을까요?
편집자는 책 컨셉의 방향성을 디자이너에게 충실히 설명해야 합니다. 사실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만 서로 이뤄져 있으면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컨셉 방향성을 이해한 디자이너는 그 카테고리 내의 다른 책을 분석하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책을 뛰어넘으려고 하면 됩니다. 뛰어넘는 지점의 핵심을 자기 스타일로 새롭게 소화하는 것이죠. 중요한 건 솔직한 의견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디자이너도 컨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면 편집자에게 제목이나 카피를 다시 뽑아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향에 대한 동의만 되어 있으면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고도 충분히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시안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마케터나 편집자의 특정 요구가 제약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인식의 차이인 것 같은데 그걸 제약조건으로만 받아들이면 스스로 한계에 갇히는 겁니다. 사실 창의성은 그런 제약조건이 있음에도 그걸 풀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때 발휘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마케팅적인 요구가 있어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생각한 본질적인 힘을 구현할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리커버가 유행하는 것만 봐도 디자인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판계 리커버 열풍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리커버는 출판계가 새롭게 찾은 마케팅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이전에는 가격을 반값으로 낮춰 구간을 재활성화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 구간을 재활성화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독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소수를 위한 소장용으로 머무르는 걸 뛰어넘어, 새로운 발견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그림까지 그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름 특별판
겨울 특별판
작년 다산북스의 경우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가 여러 번의 리커버로 계속 독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았지요?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의 경우 여름 시즌과 겨울 시즌에 각각 특별판을 냈습니다.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디자인에 변화를 줌으로써, 가치를 확대하는 데 성공한 것이죠. 또 굿즈나 패키징으로 원텍스트가 줄 수 없었던 가치도 재발견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가치를 계속 창조했기에 독자들도 호응을 해주었던 거죠. 이미 그 책을 갖고 있지만 또 새로운 디자인의 책을 구입하는 독자도 많았다고 합니다. 디자인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노보노의 인생상담>도 출간 두 달도 안 돼 표지를 바꾸었습니다.
보노보노 책은 파란색이어야 한다는 안전주의 때문에, 신간이 나왔음에도 새 책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차별화가 잘 안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노란 표지로 독자들에게 다른 가치를 주고자 했습니다. 이번 노란 표지는 봄 시즌용이므로 여름이 다가오면 또 여름 시즌용으로 바꿔주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책의 중심이 되는 메가 컨셉을 지키면서 디자인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면 매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상큼한 노란 옷을 새롭게 입은 <보노보노의 인생상담>
다산북스는 블로그 표지 투표를 통해 독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습니다. 투표를 시작하신 계기가 있으신지, 독자 의견을 얼마나 수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블로그 표지 투표는 단순한 인기투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독자의 무의식을 살펴 독자가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독자들이 자신이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적은 댓글을 살펴보면 어떤 지점에서 끌려하고 어떤 지점에서 반감을 갖는지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진짜 좋은 표지가 나오면 표가 일방적으로 몰린다는 겁니다. 결과가 비슷비슷하게 나왔다면 아직 컨셉 구현이 덜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보통 도전하지 않고 안전하게 갈 때 이런 결과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비슷하게 나온다면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표지 디자인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본문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국 출판 디자인을 선두에서 이끈 정병규 디자이너의 철학이 생각납니다.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본문의 힘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간, 행간, 여백, 서체, 글자 크기, 색깔 등이 모두 조화를 잘 이뤄야 가독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거든요. 표지와 달리 눈에 바로 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짜임새 있게 만든 책들을 보면 결국 좋은 본문 디자인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 책의 경우엔 그런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기본기가 탄탄한 출판사일수록 본문 디자인 완성도가 더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나온 다산북스 책 중에 대표님이 디자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책 한 권만 골라주세요.
개인적으로 <백석평전>을 꼽고 싶습니다. 책등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 공간을 충분히 잘 살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도 다른 책들과 달리 평면 이미지가 아닌 입체 이미지를 걸어두었습니다. 이처럼 개성이 숨 쉬는 디자인만이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