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거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상과 그림을 펼쳐놓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을 ‘나부터’ 타박타박 걸어가는 실천가는 그리 많지 않다.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는 일상의 삶이 자신의 말과 다르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보다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꿈꾸고 역설해왔으며, 사람을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평가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말에 그치지 않고, 그는 마을 이장을 맡아 동네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문학교실을 열어 이웃들과 함께 삶을 성찰하고 있다. 또 자녀 셋을 모두 시골 대안학교에 보내는 등 ‘유기농 교육’을 했으며, 집에서는 생태화장실과 텃밭 농사로 생태순환적 생활을 하고 있다. 혁명적 삶이다. 그는 지난 2월 정년보다 6년이나 일찍 교수를 관뒀다.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고려대 세종캠퍼스와 자택 등에서 강 전 교수를 만나 사회변화에 대한 전망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인터뷰 요청에 “나에 대한 포장이 될 것 같아서 인터뷰를 가능한 한 안 하고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왜 교수직을 일찍 관뒀는지에 대해 ‘마을 이장 교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은 하는 게 도리 아니겠느냐”고 설득한 끝에야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고려대 세종캠퍼스에서 강수돌(59) 전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이하 호칭 생략)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이장을 관둔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긴 바짓단을 접어서 손바느질로 꿰맨 흔적이 뚜렷한 헐렁한 바지처럼 생각의 품은 넓었으며, 마음은 따뜻했다.
―지난 2월 퇴직한 뒤 어떻게 지내요?
“전보다 주경야독을 하기가 편해요. 낮에는 텃밭을 돌보거나 사람을 만나고, 저녁엔 글을 읽거나 쓰죠. 시민강좌 같은 것도 시간 나는 대로 하고요.”
―교수 정년이 아직 6년 반이나 남았는데, 왜 그만뒀어요?
“오래전부터 정년을 5년 남기고 관두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수로서의 생활 자체가 특권인데다가 다른 직종의 평균적인 정년(60살)보다 더 하는 게 조금 죄스럽게 느껴졌어요. 또, 대학 사회가 비즈니스화되면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데 거기에 맞추는 것도 좀 힘들었고요.”
자본의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
―비즈니스화라면요?
“행정업무나 교과 과정, 심지어 학생과의 관계도 비즈니스처럼 됐어요. 취업을 어떻게 하느냐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장기 결석한 학생들에게 전화해서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야 하는 일종의 감정노동까지 하도록 요구받거든요. 그런 결과가 모두 대학교 평가지표에 반영되고, 그건 결국 교육부의 예산 지원과 직결되고요. 갈수록 교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비즈니스맨화되는 분위기들이 저랑 안 맞았어요.”
―온라인 수업도 결심을 앞당긴 요인이었던가 봐요. 최근 <교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교수의 눈물은 온라인으론 전달되지 않는다”고 표현했더군요.
“지난해 온라인 강의를 두 학기 해보니까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깊은 통증이 느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다루면 아픈 이야기들이 많은데 대면수업에서는 학생들과 슬라이드를 같이 보면서 울고 그러거든요. 또 학생들이 발표하다가 실수해서 웃기도 하고요.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게 교육인데 온라인으로 하면 그냥 글자만 보면서 진도 나가기 바쁘고, 이상하게 에너지가 빨리 소진되는 것 같았어요. 이러다가는 쓰러지겠다 싶어, 살아서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지난해 가을 피로 누적으로 인한 ‘번아웃’ 진단을 받았다.
―그 정도로 힘들었군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결과이기는 한데 그동안 너무 많이 설치고 다녔죠. 하하.”

“내가 원하는 사회가 있다면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책임성 있지 않겠어요?”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신안리의 한 음식점 마당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은 서울대 경영대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1994년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일하다가 1997년 고려대 서창캠퍼스(현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가 됐다. 그는 교수뿐 아니라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2005~2010년), 세종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역임, 현 세종시 난개발방지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공동체 활동에도 열심이다. 또 시민을 위한 교양도서 작업도 활발히 하고 있다. 최근에 펴낸 <강자 동일시>를 비롯해 그동안 단독으로 쓴 책만 40권에 육박한다.
―대학이 많이 변했다고 했는데, 학생들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최근 세종캠퍼스 학생 한명이 고려대 총학생회 간부가 됐다가 안암캠퍼스 학생들이 세종캠퍼스는 같은 학교가 아니라고 반발해서 물러난 일이 있었잖아요. 학생들이 명백한 차별행위를 해서 놀랐어요.
“저도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차별은 사실 모든 대학에서 있어왔죠. 농어촌전형으로 간 학생과 정시전형으로 간 학생, 또 수시와 정시로 입학한 아이들 사이에 서로 구별짓기를 하는 일들 말이죠. 이런 차별의식의 뿌리는 요즘 아이들이 사회나 어른, 부모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늘 차별화된 평가를 받아온 데 있어요. 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자본이 노동력을 차별화해서 A급 노동력과 B급 노동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서울 학생들은 세종 학생들을 소위 2등급 취급하는 거죠. 유명 대학을 일컫는 스카이(S·K·Y)라는 개념도 나머지 대학은 2, 3등급으로 본다는 이야기이고요.”
자본주의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강수돌의 학문적 관심은 박사 논문(‘한·독 자동차산업의 경영 합리화와 노사관계 변동’)에서 알 수 있듯 경영자보다는 노동자, 돈벌이보다는 공동체살이에 가 있다. 그동안 쓴 책들도 <노동을 보는 눈> <살림의 경제학> <나부터 교육혁명> <팔꿈치 사회> <경쟁공화국> 등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 찾기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를 영재반 넣자는 요청을 거부
―경영학자인데도 주식이나 펀드 등 이른바 투자는 한번도 안 해봤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요. 하하.
“유일하게 주식을 한번 산 적이 있긴 해요. 아주 오래전인데 연말 소득공제를 할 때 어떤 주식을 사면 그것만큼 공제해준다는 권유를 받고 신청해서 연말에 공제혜택을 받았어요. 그런데 주식을 살 줄 몰라서 안 샀더라고요. 하하. 도로 물어내고 다음해에 샀다가 곧 정리를 하고 끝냈죠. 투자라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자본의 일부가 되는 거여서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다른 경영학자들과 달리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와 삶을 고민해왔는데 언제부터 그랬어요?
“1981년에 대학에 가서 공부해보니까 이것은 돈벌이 경영이지 살림살이나 사람을 위한 경영이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이게 아니라는 고민을 했고, 졸업할 무렵에는 이런 문제의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 후 제 나름으로 만든 개념이 ‘살림살이 경영’이에요. 가정생활 등 삶에 대한 경영과 사회 경영, 세상 경영이 다 포함되는 개념이죠. 세상을 잘 경영해서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제의 본래 의미와도 뜻이 같고요”
―돈벌이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은 보이던가요?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간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인간과 같이 가려면 선한 자본이 성공해야 하는데 지금 보면 선한 자본은 다 망하잖아요.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빠진 거죠. 군주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왔듯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자본주의도 영원할 수는 없죠. 이미 자본주의를 넘어갈 맹아들이 많아요. 충남 태안의 한 어촌마을이나 경기도 포천의 산촌마을에서 노인들에게 마을 기본소득이나 마을 연금을 주는 사례 등이 그런 싹이죠. 자기들도 나이 들어 노인이 되면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있죠. 이런 것은 비자본주의적이자 가족의 원리예요. 우애와 연대, 책임감으로 운영되는 가족의 경험이 확대되면 그게 좋은 사회가 되는 거죠.”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조치원읍 신안리 자택 마루에서 부인, 막내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무로 모서리를 맞추고 황토로 벽을 메운 친환경적인 귀틀집을 1999년에 지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세종/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강수돌처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도 많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강수돌이 구분되는 지점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이나 추구하는 사상을 말로만 하지 않고 ‘나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을 팔꿈치로 밀어내는 ‘팔꿈치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산다. 자녀 교육은 대표적이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로, 강남으로 갈 때 그는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고, 아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가는 참교육을 했다. 그의 책 제목대로 ‘나부터 교육혁명’이었다.
―젊었을 때 민주화운동 등 좋은 세상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도 대부분 자녀교육 앞에서는 일반인들과 똑같거나 심지어는 더 심한 교육경쟁에 나서는데 교수님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 오히려 농촌으로 갔죠?
“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큰애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러 가는데 마치 송아지를 몰고 도살장을 향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학창시절에 겪었던 경쟁교육을 또다시 아이들이 반복하겠구나 싶어서요. 어떻게 하든 그런 교육을 받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집사람과 다짐했어요. 아이의 통지표나 성적표에 연연해하지 말자, 아이가 친구 잘 사귀면서 심신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보살피자, 자기 꿈을 가지게 되면 그 꿈을 밀어주자고 말이죠. 마침 1997년 고려대 안암(서울)과 서창(세종) 양쪽에서 교수 모집이 있었는데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서창캠퍼스를 택했죠. 당시 과천에 살았는데 아이 셋을 데리고 기쁘게 이사했어요.”
―여기 와서도 아이들을 멀리 산청과 제천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냈잖아요. 둘째와 셋째가 간 학교는 학력 인정도 안 되는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또래 간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걱정은 없었어요?
“그런 고민은 없었어요. 큰애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진학해서 무난하게 생활했죠. 수학 선생님이 ‘얘는 영재교육을 좀 시켜야 되겠다’고 전화를 해올 정도였어요. 사실 영재는 아닌데요. 하하. 학교 차원에서는 밀어주고 싶은 아이에 속했나 봐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마음은 고맙지만, 제발 우리 애는 그냥 놔두세요’라고 했어요. 다른 부모들은 우리 애 좀 영재반에 넣어달라고 하는데 저는 제발 놔두라고 했으니 선생님이 쇼크 받았나 봐요. 그 소문이 이 동네에 퍼지면서 약간 전설이 되기도 했었죠. 하하.”
동사무소 직원이 지어준 이름 ‘수돌’
―학교에서 아이 공부를 더 시켜주겠다는데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택한 거네요.
“아이 선택이었어요. 중2 때였는데 아이가 어느 날 자기에게도 꿈이 생겼대요. 뭐냐고 물었더니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꿈치고는 독특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늦게 온다고 두드려 패지 않고 머리 길다고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지 않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꿈이라기보다는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고등학교는 그것보다 더할 텐데 아이 가슴에 멍이 너무 많이 들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이한테 아빠가 후원하는 작은 대안학교가 있는데 거기 캠프 한번 가볼래라고 제안했죠. 아이가 다녀오더니 ‘꼭 그 학교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였어요. 아래 둘은 큰애 학교행사 때 가끔 가보고는 자기들은 중학교 때부터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중학교 과정이 있는 제천 간디학교에 가서 고교 과정까지 마쳤어요. 중·고 과정은 나중에 모두 검정고시를 봤죠.”
―대안학교도 종류가 많은데 교수님 자녀들이 다닌 학교는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곳을 나오면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인 대학 졸업장을 쥐기가 힘들 수 있는데 그런 걱정도 안 했어요?
“제가 자본주의를 너무 빨리 알아버렸나 봐요. 하하. 저는 일종의 고급 노동력으로 살아가지만 노동력으로 규정되는 삶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잖아요. 하하. 제가 독일까지 가서 공부하고 온 결론은 ‘노동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박사공부 하면서 이 한 줄의 진리를 얻었죠.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아무래도 많이 배우고 또 이름있는 대학 출신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진짜 중요한 거는 내면의 행복이죠. 자기 내면의 행복이 중요하지 남들이 보는 시선이 적어도 1차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런 생각에서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학교나 진로를 선택해왔으니 후회나 걱정할 일도 없죠. 애들도 그렇게 키워줘서 다 고맙다고 해요. 특히 큰애는 졸업할 때 ‘대안학교에 갈 수 있게 해줘 너무나 고맙다’면서 눈물까지 흘렸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눈물이 났고요.”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강자 동일사> 강수돌 교수 인터뷰 기사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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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998116.html#csidxe4889d8f418ce569c5418e80d32be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