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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온도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2020년 02월 1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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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여름날 병들어 누워

간혹 가난 때문에 병 얻으니 病或因貧得
내 몸 돌보는 일 너무도 소홀하네 謀身奈太?
개미 섬돌에도 흰 쌀알 풍족하고 ?階豊素粒
달팽이 벽에도 은 글씨 빛나네 蝸壁耀銀書
약은 문하생 향해 구걸하고 藥向門生乞
죽은 아내 좇아 얻어먹네 粥從內子茹
병 얻어도 오히려 독서 열중하니 猶能耽卷帙
굳은 습관 일부러 고치기 어렵네 結習故難除
_167쪽에서

담담함과 초탈함이 느껴지는 시다. 이덕무는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흔히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졌으나, 지독한 독서 편력만큼이나 시에 대한 열정과 문장 실력, 탐구 정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했다. 조선의 정경을 그대로 담아낸 ‘진경 시’, 어린아이의 천진함 같은 ‘동심의 글쓰기’, ‘기궤첨신’이라 평가받은 참신하고 통찰력 있는 수많은 시와 산문을 남겨 멀리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고 ‘한시 4대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1792년 개성적인 문체 유행을 금지하는 문체반정에 휘말렸음에도 사후 국가적 차원에서 유고 전집 『아정유고雅亭遺稿』가 간행된 대문장가였다.

비난을 환호로 바꾼 이덕무의 힘
이덕무의 시를 혹평한 대표적인 사람은 자패子佩라는 사람이다. “비루하구나! 이덕무가 지은 시야말로. 거칠고 서툰 사람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오늘날의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는 풍속과 유행을 즐겨 읊는다. 지금의 시일 뿐 옛 시는 아니다.” 18세기 조선의 문인 연암 박지원은 자패의 혹평을 비판하면서, 이덕무의 시는 오늘날 조선의 풍속과 유행을 읊고 있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살아 돌아와 다시 시의 경전인 『시경詩經』을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면 반드시 이덕무의 시를 채록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천안 농가에서 쓰다

묵은 찹쌀로 담근 술 맛있게 김 오르니 紅米爲?暖欲霞
털모자 쓴 글방 선생 날마다 찾아오네 氈冠學究日相過
낫을 찬 꼴머슴은 갈대 베다 쉬고 있고 園丁斫荻腰鎌憩
냇가의 수건 두른 여인 빨래하며 노래하네 溪女挑綿首?歌
서리 내린 들녘에는 벼 쪼아 먹는 기러기 쫓고 ?稻霜陂驅白?
볕 쬐는 언덕에는 고양이 숨겨 국화를 지키네 蔭猫陽塢護黃花
타향의 사투리는 객지의 시름을 잊게 하니 旅愁消遣?鄕話
깊고 깊은 흙담집에 누워서 듣네 臥聽深深土築窩
_212쪽에서

자패는 유득공의 숙부 유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금은 이덕무의 시를 훗날 청나라에 가져가서 반정균에게 “이덕무의 시는 평범한 길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최고의 비평을 받아왔다. 한때는 이덕무의 시가 중국의 옛 시를 닮지 않았다고 비방하고 비난했던 사람이 이덕무의 시야말로 참된 조선의 시라고 찬미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당시 이름 없는 시인에 불과했던 이덕무의 시를 청나라까지 가져가서 비평을 받으려고 했겠는가? 옛것에 익숙한 사람에게 새로운 것은 거부감과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새로운 것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순간 거부감과 반감은 호감과 수용 그리고 환호로 바뀐다.

동심, 일상, 개성, 실험, 조선의 문학가
이덕무는 동심의 시를 썼다.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항상 거짓 꾸밈 없는 진솔한 시를 썼다. 이 때문에 이덕무의 시에는 자연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진실하고 솔직한 감성, 기운, 마음, 뜻, 느낌, 생각들이 잘 담겨 있다. 생동生動하는 이덕무 시의 생명력은 다름 아닌 동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이덕무는 일상의 시를 썼다. 이덕무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별한 곳에서 시를 찾지 않았다. 이덕무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요 주제였다. 특히 이덕무는 사람들이 별반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무심히 지나치는 주변의 하찮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포착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인이었다. 셋째, 이덕무는 개성적인 시를 썼다. 개성적인 시를 썼다는 말은 옛 사람을 답습하거나 흉내 내는 혹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시를 쓰지 않고 자신의 색깔이 담긴 시를 썼다는 뜻이다. 이덕무는 아무리 잘 쓴 시라고 할지라도 옛사람과 다른 사람의 시를 닮거나 비슷한 시는 가짜 시요 죽은 시라고 말했다. 반대로 비록 거칠고 조잡하더라도 자신만의 감성, 기운, 뜻이 담긴 시는 진짜 시요 살아 있는 시라고 했다. 넷째 이덕무는 실험적인 시를 썼다. 옛사람의 시를 닮지 않은, 또한 다른 사람의 시와 비슷하지 않은 개성적인 시를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덕무는 그 방법을 실험적인 시, 모험적인 시, 도전적인 시에서 찾았다. 실험과 모험과 도전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창작이란 새로운 글을 쓴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답습, 모방, 흉내가 창작의 적이라면 실험, 모험, 도전은 창작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실험과 모험과 도전이 없었다면 기궤첨신奇詭尖新한 이덕무의 시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이덕무는 ‘조선의 시’를 썼다. 앞서 살펴본 동심의 시, 일상의 시, 개성적인 시, 실험적인 시의 미학이 집약된 이덕무의 시학詩學이 바로 ‘중국 사람의 시’와는 다른 ‘조선 사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사람들이 시의 전범이라고 숭상한 이백과 두보 등 중국의 시는 중국의 풍속과 풍경, 중국 사람의 감성과 기운 그리고 뜻과 생각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덕무는 자신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의 풍속과 풍경, 그리고 뜻과 생각이 담긴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조선 사람이 중국 사람을 닮으려고 하거나 비슷해지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단호하게 내리는 눈처럼 일깨우다
모던한 감성의 고전연구가 한정주는 이덕무를 좋아하는 만큼 김수영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방가르드 정신이다. 아방가르드 정신의 본질은 ‘혁신’이다. 혁신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상상하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개척하고, 생산하고, 창조한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불온성’이다. 불온해야 낯익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으며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온함’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글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요, 사람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이덕무의 시는 때론 짐짓 뒷짐을 지고, 때론 언 땅에 무를 자르듯 단호하게 내리는 눈처럼 우리의 정신을 일깨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 쪽수: 316쪽
  • ISBN: 9791130628370

목차

  • 들어가는 말 동심, 일상, 개성, 실험, 조선의 시인


    1.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운 모든 것이 시다

    2. 말하지 않고 말하고,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3. 좋은 시는 울림을 준다

    4. 살아 움직이는 생물

    5. 압축과 생략의 묘미

    6. 기이하고 괴이하고 날카롭고 새롭다

    7.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

    8. 매미에 담은 마음과 귤에 새긴 삶

    9. 진경산수화와 진경시

    10. 놀이와 장난과 창작

    11. 백탑의 맑고 순수한 우정

    12. 시에는 소리가 있다

    13. 조선의 시를 써라!

    14. 기하실 유금과 『한객건연집』

    15. 나의 절친 박제가

    16. 시에는 감정이 있다

    17. 시화詩話, 시품詩品, 시평詩評

    18. 자연을 묘사하는 법

    19. 시에는 색깔이 있다

    20. 삶의 온도 냉정과 열정 사이

    21. 시에는 경계가 있다

    22. 사랑

    23. 영처?處의 미학

    24. 매화의 미학

    25. 나의 스승 나의 벗 박지원

    26. 시를 많이 짓지 않은 박지원

    27.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28. 소설은 구조의 문학, 시는 직관과 감각의 문학

    29. 담담함과 읊조림

    30. 산문 같은 시, 시 같은 산문

    31. 풍속화와 풍속시

    32. 이덕무와 신천옹

    33. 아방가르드 정신 – 이덕무와 김수영

    34. 중심과 주변

    35. 언어의 선택

    36. 꿀벌은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다

    37. 가난한 날의 벗, 유득공

    38. 이덕무와 달

    39. 삶의 냄새

    40. 청계천 수표교 풍경

    41. 봄날 햇볕과 가을 서리

    42. 거울과 동심

    43. 시 감상법

    44. 꽃에 미친 바보, 김덕형

    45. 국경을 초월한 우정

    46. 시회詩會와 동인同人 – 서재 문화 혹은 정자 문화

    47. 일상의 묘사

    48. 소설은 스토리, 시는 메시지

    49. 시흥詩興과 시정詩情

    50. 희망과 절망

    51. 이덕무와 굴원

    52. 이덕무와 도연명

    53. 생활의 발견

    54. 기호와 취향 – 윤회매

    55. 소완정의 주인, 이서구

    56.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57. 세검정 풍경

    58.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

    59. 왜 시를 읽는가?

    60. 기묘한 발상

    61. 관물觀物 – 바라본다는 것

    62. 향토시 – 이덕무와 신동엽

    63. 득오得悟 – 깨닫는다는 것

    64. 기이한 시인 이용휴

    65. 한시의 미학

    66. 시와 에피그램

    67. 큰처남 백동수

    68. 작은처남 백동좌

    69. 자득의 묘미

    70. 한바탕 울 만한 곳

    71. 그림 같은 시, 시 같은 그림

    72. 시와 계절의 기운

    73. 오직 성령性靈을 드러낼 뿐

    74. 슬픔과 체념 사이

    75. 시인과 궁핍

    76. 작은 것의 아름다움

    77. 운율과 리듬

    78. 감성과 사유

    79. 절문切問의 미학

    80. 시와 여행

    81. 시 짓는 어려움과 괴로움

    82. 검서체 – 실험과 창조

    83. 작고양금酌古量今 – 옛 시와 새로운 시

    84. 시가 바로 그 사람이다!

    85. 관재의 주인, 서상수

    86. 아정雅亭 –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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