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소개
《에픽 #03》의 제호는 ‘자기 앞의 생’이다. 원제의 본래 의도에 더 가깝게 번역됐더라면, ‘여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라는 열네 살 모모의 질문으로 시작해 “사랑해야 한다”라는 모모 스스로의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닌 비자기(nonself)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미래도 결국 나와 나 아닌 무수한 비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겨우 가늠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모모의 긴 이야기 끝에 내린 “사랑해야 한다”라는 결론은 지금의 이야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 우리 앞의 또 다른 생에 대해 계속해서 말해야 한다는 일종의 명령처럼 들린다. 사랑을 줄 때 동시에 받게 되는 것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시작된다.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앞날에 대한 가능성과 전망을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번 호의 커버스토리 ‘i+i’에서는 아역배우로 시작해 28년 간 배우로서의 이력을 쌓아온 이나리의 이야기를 차경희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다. 타인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표현 도구로 삼는 예술가와 해방촌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문학작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정작 자기 자신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주제로 한동안 머무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역배우로서 환대와 지지를 받던 순간들과 더불어 연기를 쉬어가던 순간들, 그럼에도 “언제나 몇 번이라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배우로서의 이나리를 함께 발견할 때, “나리 씨는 자기 앞의 생은 자신의 몫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art 1’에서는 앞서 언급한 차경희의 ‘i+i’ 외에 세 편의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을 만난다.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소수자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귀기울여온 ‘닷페이스’의 박소현 PD가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역사에 대한 취재 과정을 재구성해주었다. 시인이자 편집자인 서효인이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에는 할머니와 두 딸에 대한 섬세하고도 애틋한 그의 생활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송기역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면과 배제의 거리두기를 지적하며 여러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아내주었다.
‘part 2’에서는 뮤지션 이랑과 보험설계사 이랑의 대화로 구성된 버츄얼 에세이 ‘if I’와 금정연, 오은교, 최지혜가 논픽션과 픽션 도서를 각각 한 권씩 엮여 소개한 세 편의 ‘1+1 리뷰’를 통해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픽션 파트인 ‘part 3’에서는 김지연, 이두온, 이장욱, 장류진, 황모과의 신작 단편소설을 만난다. 무엇보다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게 될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란다.
- 쪽수: 326쪽
- ISBN: 9772733807003
목차
epigraph
임 현 · 나를 말할 때 이야기하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하여 004
part1
i+i
차경희 · 언제나 몇 번이라도 023
creative nonfiction
박소현 · 퀴어, 세대, 공간 050
서효인 · 그림책 생활 074
송기역 · 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 096
part2
virtual essay
if I
이 랑 · 자살은 사망보험 가입 후 2년 뒤부터 보장됩니다 128
1+1 review
금정연 · 믿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140
오은교 · ‘시설’과 ‘지역사회’라는 이중 신화의 중력을 딛고 150
최지혜 · 자유로워져서 되돌아가기 158
part3
fiction
김지연 · 마음에 없는 소리 172
이두온 · 네가 내 목숨을 구했어 202
이장욱 · ●● 228
장류진 · 미라와 라라 254
황모과 · 네 식구 286
graphic novel
의외의사실 · 자기 앞의 생 314